언젠가 전철을 탔을 때 제 옆에 7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어르신 한 분이 경로 좌석이 아닌 일반좌석 영역에 서 계셨습니다. 퇴근 시간인지라 전철 안이 제법 붐비던 때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표정이 왠지 심상치 않았습니다. 혀를 끌끌 차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끝내 안 일어나네…….” 저는 그 어르신의 눈길이 향하는 앞쪽을 쳐다보았습니다. 젊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는 그 청년이 자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양보하기 싫어서 일부러 자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때 옆에 60대로 보이는 어떤 여성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세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70대의 어르신은 계속 굳은 표정으로 그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고, 10여 분 후 제가 내릴 때까지 그 공간에서 특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잠깐이지만 미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과 젊은 청년, 전철이라는 장소에서 두 사람이 만들어 낸 긴장감을 잠시 느꼈습니다. 양보 받고 싶어 하는 이와 양보하기 싫은 이, 어른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사람과 앉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나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어느 시대이든 어느 사회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세대 간의 갈등은 존재합니다. 어르신과 젊은이 간의 생각의 차이는 상충한 두 세대 간의 갈등을 낳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변화된 사회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이전 세대와 다른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적 형태를 쉽게 수용하고 기존의 문화적 관습을 뒤엎는 성향이 있습니다. 대중교통에서의 자리 양보는 지금의 노인 세대가 젊었을 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구 개인주의의 발달과 효 문화의 쇠퇴로 인해 어른 공경의 모습은 점점 약화되는 추세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중교통에서의 ‘자리양보’는 지극히 당연한 모습에서는 멀어진 것입니다. 한편 노인 세대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수용보다는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며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시키려는데 더 많은 애착을 갖습니다. 더욱이 한국 사회에서 효와 관련된 어른 공경에 대한 문제는 노인 세대들이 최고의 덕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지켜왔던 도덕규범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인 세대에게 있어서, 젊은 세대의 약해진 어른 공경의 태도는 떨떠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철 안에서의 어르신의 얼굴에서 느껴진 것은 ‘못마땅함’이었습니다.
두 개의 가치가 맞붙어 대결하는 듯이 보입니다. 한쪽은 어른으로서의 존중을 원합니다. 다른 한 쪽은 젊은 세대에 대한 인정을 원합니다. ‘존중과 인정’ 서로서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출발점이자 해결책은 ‘대화와 이해’이지만, 무엇보다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존중과 인정의 마음은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하지만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생각은,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갈등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내가 옳다’에서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로의 전환적 사고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할 수도 있지, 당신 의견이 옳을 수도 있겠네…….’ 이는 갈등관계의 회복에 있어서 중요하고 혁명적인 사고입니다.
전철에서 젊은이를 향해 울분의 표정을 보이셨던 그 어르신을 생각해 봅니다. 적어도 그분은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인생을 살아오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른 공경의 가치를 후세대가 이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젊은이를 향한 가르침의 마음을 가지셨을 듯합니다. 분명 정당한 생각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평가 절하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전환은 어떨까요? ‘꼭 시니어가 앉아야 하는가? 젊은이가 양보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올바른 마음일까? 저 젊은이도 얼마나 힘들까? 저 젊은이도 무엇인가 제 생각이 있겠지? 양보하지 않을 수도 있지…….’ 만약 이러한 마음을 그분이 갖는다면, 아니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그때의 붉으락푸르락하던 분개의 표정보다는 좀 더 온화하고 평온한 모습을 제가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라떼는(나 때는) 말이지~’보다 ‘너 때는 어떠냐?’로 주제를 바꾸면 어떨까요? 지나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요, 보람의 추억이지만, 이제는 이해와 관심의 초점을 우리 자녀 세대에게 옮기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따스하게 이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할 때,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기성세대를 멀리하기보다 좀 더 가까이하려 할 것입니다. 그 따스한 손길을 느끼고 싶어 좀 더 함께하려 할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아름다운 모습이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 모두에게 가득함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샬롬의 은혜’가 풍성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