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인제 농구대회의 시작
지난 회에 밝혔듯이 우리 교회 공터 즉, 본당과 교육관 사이에 농구장이 생긴 것은 1993년이었고, 1994년 6월 '제1회 당회장배 농구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농구골대가 하나였기 때문에 '3x3 길거리' 농구대회 형태였습니다. 3년 동안 '3x3길거리' 농구대회를 진행하면서 제대로 된 농구장이 없는 것을 아쉬워한 성도님들께서 한분 한분 도움을 주면서 드디어 1997년 그 자리에 규격은 작지만 어엿한 농구장이 탄생하였습니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하얀 라인들이 제대로 된 농구장이었습니다. 몇몇 청년들과 라인을 칠하는데 힘든 줄을 모르고 완성했고, 제4회 대회 1997년부터는 5인제 농구대회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 공고를 하자마자 중고등부 학생과 청년들의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고 장년부와 교역자 팀에서도 적극 참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5인제 농구대회는 시작되었고 대회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이러한 열기는 여러 곳에서 변화가 왔습니다. 먼저는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뽑을 때 첫번째 조건(?)이 운동 그 중에서도 농구를 잘하면 무조건 뽑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뽑힌 분이 대표적으로 고oo 목사님이셨습니다. 얼마나 펄펄 날라 다녔는지 웬만한 청년들은 저리 가라였습니다. 교역자 팀의 실력이 우승권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나간 청년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운동권(!)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밖에서 운동하다가 교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장년/교역자 팀의 농구 실력이 이제 어디나 내놓아도 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농구장이 있는 것과 우리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된 다른 교회 농구팀이 농구시합을 하자고 도전장을 던지는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 농구 베스트 멤버로 시합을 했더니 우리가 정말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 고목사님, 이종훈 청년, 이오영 청년, 김정권 청년, 이지훈 청년, 안문기 청년 등의 조합은 아마추어 농구팀으로서는 탑(top)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농구팀의 강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팀웍과 겸손입니다. 팀웍은 이해되는데 겸손은 무엇인지요? 농구라는 경기는 골을 많이 넣어 점수가 많은 팀이 이기는 경기라 선수들이 너도나도 골을 넣으려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특히 아마추어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농구팀은 찬스가 더 좋은 선수한테 패스하여 확률이 높은 경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하지 않고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에게 패스하고 더 좋은 위치가 있다면 그 동료에게 패스 또 패스.. 그 중에 압권은 우리 이건영 담임목사님의 3점 슛입니다. 상대방 교회 팀들은 담임목사님이 강권적으로 뛰겠다 하여 실력이 낮은데도 넣은 줄 알고 초반에는 마크를 하지 않다가 몇번 담임목사님의 3점슛을 당하면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을 마크하면 다른 선수들, 고목사님이 펄펄 날아다니고 이를 막으려면 이오영 청년의 3점 그리고 이종훈 청년의 런닝슛과 이지훈 청년의 골밑슛이 터지고 그러다가 담임목사님의 또 4점슛과 같은 3점슛이 터지고, 정말 막기 힘든 팀이 되었습니다. 또한 담임목사님과 모든 선수들은 한팀(one team)의 동료 선수로 차별이 없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슛이 성공하면 하나 같이 목사님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고, 목사님의 컨디션이 안좋으면 바로 교체되어 나가시고 밖에서 응원하시다가 다시 들어 오셔서 뛰시고 정말 평등한 팀원들이었습니다. 2000년대 이르러 우리 교회팀 만으로 진행하던 농구대회가 인천시내 교회 농구대회로 발전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소문을 들은 많은 교회들이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2. 2000년대 농구대회 - 인천시 교회 대항 농구대회로 발전
농구대회를 진행하면서 어려운 점은 판정이었습니다. 워낙 빠른 운동인데다 규칙이 복잡하여 판정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 심판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청년들은 양보를 하긴 해도 돌아서면 아쉬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격자 반칙인데 수비자 반칙으로 판정함으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지게 되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불상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2명의 심판이 최대한 공정하게 볼려고 노력했고 모든 참가 선수들이 인정하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항상 남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다른 교회가 참석하면서 이제 인천 최대의 아마추어 농구대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에 판정이 안될 거 같아 인천시 농구협회를 찾아가 이러이러한 농구대회가 있는데 협회에서 심판을 파견해 줄 수 있는지 질의하였습니다. 그때 심판으로 오신 분이 당시 송도중학교 송기화 감독으로 꽤 유명한 농구 감독이었습니다. 송도중학교라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농구 명문학교인데 그 감독님과 또 농구협회 심판 1명이 심판으로 오셨으니 우리 '당회장 농구대회'는 명실상부 최고 권위의 대회가 된 것입니다.
인천에서 이름만 들어도 아는 교회인 인천순복음교회, 제일교회, 송월교회, 주안장로교회, 낙원교회, 계산교회 그리고 중견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베스트 멤버를 참가한 것이 아니라 전과 똑같이 고등부/청년부1/청년부2/장년부1/장년부2/교역자 팀등 최소 5~6팀이 참가하니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 팀은 온전히 1팀 베스트 멤버라 우리가 이기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매년 우승은 다른 교회가 차지한 것은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우리 교회도 1팀으로 만들자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제2교회라 그런지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 열심히 참여하고 뛰자는 생각이었나 봅니다. 시합 기간 동안은 교회의 착은 축제였습니다. 선수들의 가족이 주일 저녁까지 남아서 응원하고 함께 참여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수준높은 선수들의 참여와 물론 최고 권위의 심판진의 판정으로 시작부터 폐회까지 명승부의 연속으로 응원하는 분들의 애간장을 태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3. 운동을 통한 성도님들과 아름다운 동행
어느 대회인가, 결승에서 만난 두 팀, 교역자 팀과 낙원교회 팀. 이 당시 교역자 팀은 주일 저녁과 금요철야예배 후 새벽 2시까지 맹훈련을 한 팀으로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의 실력이 일취월장, 드디어 결승전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인천순복음교회를 이기고 올라온 강적 낙원교회와의 일전. 다음 날 월요일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황세광목사님께서도 선수로 참석하여 마지막 불꽃을 피우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번 만큼은 다른 교회에 우승을 넘겨주지 말자는 결의가 대단했습니다. 멤버도 좋았습니다. 담임목사님, 노원석 목사님, 천종민 목사님, 고정민 목사님, 황세광목사님 그외 키크신 목사님 등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초반 우리의 상승세, 담임목사님의 3점슛과 고목사님의 현란한 플레이와 노원석 목사님과 황목사님의 거친 수비와 천목사님의 속공 플레이에 낙원 교회는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5점차 이상 벌어져 작전 시간 요청. 젊은이들로 구성된 낙원교회는 많은 응원단의 열띤 응원은 이곳이 마치 낙원교회 같았습니다. 이에 질세라 우리의 권사님들도 열심히 은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상대방은 전열을 갖추고 하나둘씩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하더니 시소게임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거친 플레이에 수비하던 황세광 목사님과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얼굴을 만지시더니 얼굴에 피가 흐르는 것이었는데, 쓰고 있던 안경이 깨지면서 얼굴이 찢어진 것입니다. 내일 유학길에 올라야 하는데...
지난 번 황세광 목사님께서 귀국 설교 후 만나 뵈었더니 얼굴이 꿰맨 흉터가 조금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송구스러웠던지 옛날 농구대회 얘기를 드렸더니 정말 그 농구대회가 재미있었다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탱크같은 황목사님이 빠지면서 전세는 낙원교회 쪽으로 흘러 근소하게 역전패, 낙원교회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재미있는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졌는데도 아쉬워하는 분이 한 분도 아니 계셧습니다. 모두 상대방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것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팀이었습니다. 아쉬움이 클텐데 말입니다. 담임목사님 그리고 모든 교역자 분들의 얼굴에 "모두 열심히 뛰었다. 최선을 다했다. 상대방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라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담임목사님 미소 속에 '올해도 참 열심히 뛰었고 모두 아름답게 마무리했다'라는 것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결승전 후에 '짜장면 시키신 분'하며 나타난 중국집 주인 아저씨. 그날은 워낙 많이 주문해서인지 오토바이가 아닌 봉고차로 짜장면을 싣고 오셨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응원단까지 모두 축제에 참여하여 식사까지 재밌게 나누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배려깊은 준비였습니다. 성도님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진행되어온 '당회장배 농구대회'는 새성전 건축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성도님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은 운동 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모든 성도님들께서 잘 아실테니 필자가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제목과 같이 '운동 통한' 아름다운 동행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20년 후에 후임목사님이신 노원석 목사님에 대한 '담임목사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쓰게될 것을 기대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